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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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돌아보다
2016년 10월 05일 07시 47분  조회:1750  추천:0  작성자: 최상운
                                       금강산을 돌아보다.
 
 
     우리 일행은 평양순안공항에서 금강산으로 가는 전용뻐스에 올랐다. 평양을 지나 해변의 도시인 원산시에 들려 저녁을 먹고 금강산으로 가기로 하였다. 원산시에는 유명한 송도원호텔이 있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유람객들은 꼭 이 호텔에서 들여 식사를 하였다.
      우리는 호텔로 들어가기전에 먼저 호텔 주위를 둘러 보았다. 송도원호텔 주위는 푸른 바다였다. 아직 해가 지지않아 석양노을에 비낀 바다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난생 처음으로 보는 장면이였다. 저녁노을과 바다가 황홀하게 조화를 이룬것이 정말로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듯 하였다. 유람객들은 저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놓칠세라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다.
      식탁에는 풍성한 산해진미들이 가득 올랐다. 여러가지 료리중에서 제일 인상적인 것은 사발만큼 넓적한 돌을 달구어 놓고 그 돌우에 양념에 절인 얇게썬 소고기를 구워서 먹는것였다. 평양 소주에다 그 소고기를 먹으니 세상 별미였다. 하나 죽어도 모를지경이였다.
    저녁을 자시고나니 20시30분이였다. 차는 송도원을 떠나 금강산을 향하여 달리였다. 밤이여서 그런지 원산시로부터 금강산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 길로 보이였다. 꼬불꼬불한길을 달리다보니 아짜 아짜하고 긴장한감이 들면서 의자 손잡이를 잡았는데도 저도 몰래 손에 땀을 쥐였다.
       22시30분에 종점인 외금강호텔 앞에 뭠추어섰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딴 세상에 온 감이들었다. 산골 답지않게 도회지처럼 호화로운 건축물에서 조명등이 번득이였다.
      우리는 외금강호텔에 주숙을 정하였다. 연변병원에서 내과 주임의사로 근무하다가 정령 퇴직한 정룡수교수님과 한 방에 들었다. 정 교수님은 퇴직후 국내의 유명한 명승지를 돌아보았으며 대만과 동남아 여러나라를 관광 하시였다고 했다.
     나는 려로에 지쳐 인츰 잠에 골아떨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정교수님은 내가 너무도 코를 골아 잠을 제대로 자지못했다고 하자 나는 난감했다.
    나는 금강산 유람을 떠나기전에 금강산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금강산은 조선 강원도 고성군, 금강군, 통천군의 경계에 있는  산인데 동쪽에는 동해가 있었다.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 세개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금강산에는 1638메터가되는 비로봉을 비롯하여 1만2천개의 기묘한 산 봉우리가 있었다. 금강산의 동서길이가 40km이고 남북의 길이는 60km이며 총면적은 530펼방킬로메터이다. 금강산은 계절따라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봄에는 금강산, 여름에는 봉래산, 가을에는 풍악산, 겨울에는 개곡산 설봉산이라 부렀다.
      아침 5섯시가 되자 나는 산책하려 나왔다. 호텔주위를 살펴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원산에서 금강산으로 올때에는 밤이여서 눈뜬소경처럼 주위 환경을 볼수없었는데 아침에 진정한 금강산의 면모를 보게 되였으니 말이다.
      외금강호텔 주위 동서북은 높은산으로 둘러 있고 동남쪽이 열려 있었다. 외금강 호텔 근처에는 금강산호텔과 리산가족면회회관이 있었다. 외금강 호텔에서 멀지않은곳에  금강산 온천이 있으며, 맛사지봉사장, 해수욕장, 금강산 샘물공장이 있었다.
      산기슭에는 붉은색을 띤 참솔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호텔 정원은 나무와 화초들이 정결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산, 나무숲, 잔디, 화초가 조화를 이루어 보기좋았다.
      동쪽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정갈한 약수터가 있었다. 그 약수를 마시고 나니 거뿐해나며 정신의 맑아지는감을 느끼였다.
     정각 7시가되자 아침식사를 하였다. 아침식사는 빵과 죽이 주식이고 기타여러가지 산나물볶음, 닭알지짐, 두부튀김, 문어튀김 등이 있었다.
     여덮시가 되자 금강산 구경을 떠났다. 오늘의 로정은 외금강 지역에서 가장 볼거리가 많은 구룡연구역을 보는것이였다. 차가 외금강호텔에 남서 방향으로 30분 달리자 구룡연 정차장에 도착하였다. 구룡연 정차장으로 부터 유람객들은 도보로 산길을 따라 내처 올리 걸어야만 했다.
     조선 려행사에서는 평양으로 부터 금강산으로 오는 려행 안내원이 있고 금강산을 전문 책임진 안내원이 따로 있었다. 평양공항에서 금강산으로 올때에는 김송미 안내원이 맡아 하였는데 금강산에서는 한금희 아내원이 맡아 하였다. 한금희 안내원은 금강산에서 태여나 학교를 다니였으며 후에는 자습하여 대학을 다니였다고 하였다. 그는 금강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예뿌고 말도 잘하였다.
     구룡연 정차장을 떠나서부터 산발이 가파로웠다.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었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맑은물은 어찌도 맑은지 푸른 빛을 띠였다. 계곡에는 물이 고인 담이 있었는데 담이 깊을수록 물은 더욱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시간이 있으면 그 파란 물속에 뛰여들어 물놀이를 하고 싶었다.
     맑고도 푸른 물을 보노라니 방랑시인 김삿갓이 지은 시구가 떠 올랐다.
     
    시냇가에 돌없으면 냇물은 멋없고
     돌 있는데 물 없으면 돌 또한 무색하리
     이세상에는 돌이였고 냇물마저 곁들었으니
     하늘은 조화부리고 나는 시를 짓노라
 
     오늘은 마침 (팔월십사일) 하늘이 선녀들이 구름타고 내려오는 날이란다. 어제 밤에는 비가 질철거리며 내리였는데 오늘 우리의 마음을 알아나 주는듯 하늘은 개이였고 선들바람이 불어와 길 걷기가 제법 좋았다.
      올리걷는 길옆 개울가에 부부욕조 바위가 있었다. 가이드가 저바위가 유명한 부부욕조 바위라고 했다. 나는 그말이 신기하여 그 바위를 찬찬히 훝어 보았다. 그렇다고 생각하여서 그런지 정말로 그 바위가 욕조속에서 다정한 부부가 모욕하는 감이들었다.
      부부욕조바위를 지나면 류산암이 나타난다. 류산암이란? 옛날 량반들이 이곳에 모여 흐르는 물과 함께 누워서 기생들이 부어주는 술을 마시였다고 하는데서 이름을 가진 바위라 했다. 류산암을 지나 한참걸으면 길옆에 가늘고 키작은 대나무를 보게 된다. 흔히 볼수없는 작은 대나무이다. 이 대나무는 유독 금강산에만 볼수있는 “산죽”이란 대나무이다. 산죽은 용케도 고산기후에 적응하면서 생존해 있었다.
       류산암에서 더 올라가 고개를 들고 산마루를 올리다 보면 괴상한 바위들을 보게 된다. 생김새가 코끼리같은 바위, 엄마가 아기를 업은것 같은 엄마 바위가 보인다. 참 신기하게도 정면과 측면에서 볼때 그 바위가 다른 형태로 보이였다. 그곳에서 한참올라가면 또 산마루에 못생긴 사람바위가 보인다. 그 바위는 마치 임신부 같아보이가도 하였다.
      류산암에서 조금 올라 가면 옥류봉 산마루가 보인다. 옥류봉마루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내려다보는 개구리모양을 한 바위가 있었다. 개구리 바위에 깃든 이야기가 있다. 옛날 온정리 닭알바위산아래 아늑한 기슭의 우물가에살던 개구리가 금강산 경치가 좋다는 까마귀의 말을 듣고 옥류봉산마루에 올랐다가 아름다운 구룡연의 계곡에 취하여 돌아갈줄 모르고 돌로굳어 졌다고 한다.
      개구리 바위를보고서 한 굽이 돌면 길 왼쪽에 세존봉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솟구쳐 흐르는 샘물이 있는 곳에 이르게된다. 이 샘물은 천지개벽이래 사람들의 발길이 이르지 못한 곳인 세존봉 등줄기에서 금생수가 기화요초를 씻어내리는 물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후에 이 물이 이름을 “삼록수” “불록수”라 불렀다. 나는 허리를 굽혀 산삼과 록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삼록수를 맘껏 마시고 나니 시원해나며 정신이 거뿐해지는 감이 들었다.
     삼록수에서 언덕진 비탈길을 따라 오르다가 “만경교”라하는  작은 다리를 건너서면 지나온 삼록수 쪽켠 절벽우에 신통히도 자라모앙을 나타내는 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를 일명 자라바위라 한다. 자라바위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라는 소문을 들은 자라가 적벽강 하류에서 탑승길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한다. 오르다보니 오를수록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와 향기에 취해 계속 걸으니 꾀꼴새를 비롯한 산새들이 우짓는 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왔고 수없이 굽이도는 길을 따라 다가 설듯 하다가도 물러가고 비껴섰다가는 마주칠듯 나타나는 기암절벽이 량옆 앞뒤로 어기는데 울퉁불퉁 울긋 쫑긋 봉마루마다 기암절벽이 웅크리고 포개고 업치여 놓은것 같았다. 그 모습이야말로 금방 떨어질듯 내려다보는것 같고 바람에 날아날 듯 간들거리는 것 같아 이 광경에 도취된 자라는 제자리로 돌아 못가고 그만 돌로 귿어져버렸다 한다.
      자라바위를 보고 굽이진 길로 오르다가 왼쪽 세존봉을 바라보면 그 중턱에 맨머리로 앉아있는 사람 모양이 바위가 보인다. 그바위가 옥황상제 바위다. 옛날에 금강산이 천하명승이라는 소문을 듣게된 하늘나라의 옥황상제가 금강산에 내려와 1만2천 봉우리를 다 돌아보고나서 구룡연에 이를렀다. 구룡연이 하도 맑아 더는 참을수 없었던 그는 자신이 옥황상제라는 것도 잊고 관과 옷을 벗어 바위우에 놓고 목욕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때 금강산 산시령이 나타나서 “나는 금강산의 산시령이오. 금강산의 벽게수가 천만종의 약초를 씻고 흘러내린 신령약수라는 걸 그대는 모른단 말이여, 사람들이 찾아오면 의례히 이 물을 마시는데 그대는 이물에 목욕을 하고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니 그런줄 아오.”라고 하더니 옥황상제의 관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관을 잃은 옥황상제는 하늘로 돌아가지 못하고 세존봉중턱에서 맨머리로 굳어졌다는 전설이 있었다. 안개와 구름이 이따금 부꾸러워하는 그의 몸을 가리워주기는 하지만 맑은 날에는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사죄하는듯 보인다.
      세존봉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금강문 휴식장이 있었다. 금강문 휴식장에서 휴식하면서 마중켠 산을 바라보면 세종봉절벽이 보인다. 세존봉절벽은 마치 힘장수가 정교롭게 포개여 쌓아놓은 옛 돌성을 방불케 하므로 그 절벽 바위를 “성벽암”이라 부른다. 이 자연돌성 우에는 마치 머리는 토끼같고 몽뚱이는 거북기 잔등같이 생긴 기묘한 바위가 보이였다. 이 바위를 “토끼바위”라거나 “거북이 바위”라 한다. 옛날 금강산 구경을왔던 달나라의 토끼가 보름달이 되기전에 돌아오라는 옥황상제의 명을 어기여 처벌받아 돌로 굳어 졌다는 전설도 있다.
      금강문휴식터에서 좀더 올라가면 금강문을 지나가게 된다. 금강문은 집채같은 큰 바위가 길을 막아 겹치고 쌓인 가운데를 <> 모양의 구멍이 아래로부터 우로 꿇어져 이어서 층게를 밣아 올라 옥류동쪽으로 나가게 되였다. 옛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길이 막히여 “새장” “맥힌담장”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후 홍수로 인하여 오늘처럼 문이 생기고 구룡연으로 통하는 길이 개척되였다고 한다.
      금강문을  지나 금문교 다리를 건너 가파로운 계단을 따라 올라가 맞은켠 옥녀봉중턱을 바라보면 소나무숲속이 보인다. 그 숲속을 헤매며 내닫는 기관차 같아 보이는 바위가 있었다. 기관차 바위를 보고 왼쪽으로 굽이돌아 오르다가 옥류동에 이르기 직전에 “감사굴”이라는 바위굴이 있다. 감사굴을 지나 조금 더 가면 흰색갈을 띤 금강산의 돌 가운데서도 비바람에 닳고 물에 씻기여 류달리 눈부시게 흰빛을 뿜는 바위들이 듬성 듬성 서 있는 가운데 맑고 푸른 백석담이 있었다. 백석담은 말 그대로 백옥같은 돌과 수정같은 물이 어울려 참으로 정가롭기 그지없다.
      백석담에서 한굽이 꺾어 돌면 앞이 환히 트이면서 절묘한 골짜기가 활짝 열리는데 이곳이 옥류동이다. 옥류동은 예로부터 수정같이 맑은 물이 구슬이 되여 흘러내린다고 하여 불러온는 이름이다. 옥류동골안에 들어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앞에는 금방 피여난 흰 꽃송이 같은 첨화대가 있고 그뒤로는 이쁘장한 옥녀봉을 비롯하여 여러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있어 골안 풍경은 더없이 황홀하다. 옥류동 골안에서 특별히 눈에 띄우는 명소들로는 수정을 녹여서 쏟아 부은듯 맑고 푸른 옥류담, 수정같은 물방울이 구슬처럼 굴러내리는 옥류폭포, 누구나 오르면 노래와 춤이 절로 흘러나온다는 무대바위가 있다. 옥류담은 긴 배모양으로 생겼는데 그면적은 600평방메터였다. 깊이는 5-6메터였다.
      오색물이 감도는 담소들을 지나 오라가보면 어느사인가 옥류폭포앞에 이르게 된다. 옥류폭포는 멀리서보면 문양고운 흰비단필을 늘여놓은 듯 하다. 길이 50메터가 되는 옥류폭포는 수천만년동안 물에 씻기여 거울처럼 닦아진 백옥같은 너럭바위우로 옥같은 맑은물이 구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참으로 옥류동의 절경이야말로 물과 돌이 환히 빛나면서도 그윽하고 기묘하여 아름답고 화려하였다. 하기에 옥류동은 그풍경에서 무엇하나 덜어내거나 보태여도 안될 원숙하고 완벽한 한폭의 그림과 같이 나름다워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처다보았다.
      옥류폭포로부터 한굽이 돌아오르면 절경이 련이여 펼쳐지는데 한참가면 련주담에 이른다. 련주담은 이름 그대로 두개의 파란구슬을 련달아 매여놓은듯한 아름다운 두개의 담소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선녀”들이 흘리고 갔다는 두 개의 구슬이 오늘은 담소가 되여 구슬처럼 파란 물이고였다가는 다시 멈쳐흐르고 있다고 한다.
      련주담에서 왼쪽으로 세존봉 곁가지가 뻗어내린 등글뾰족한 봉우리우에는 보는 장소와 사람의 시각에 따라 각이하게 보이는 봉황새 바위가 보인다. 봉황새 바위는 련주담에서 바라보면 그 모양이 신기하여 사람마다 서로 다르게 이름지어 부르게 된다. 한금희 가이드는 우리를 보고 봉황새 바위를 가리키면서 어떤 동물로 보이는가? 물었다. 신기하게도 각자가 다르게 대답했다. 한금희는 웃으면서 저 바위는 생김새가 신기하게 생기여서 사람마다 다르게 본다고 하였다. 학자들이 볼때에는 책을 보는것 같고 화장을 즐기는 처녀들이 볼때에는 거울을 보며 화장을 하는것 같고 용접공이 보면 용전하는것 같아 보이며 화가가 볼때에는 그림을 그리는것 같아보인다고 설명했다.
      련주담에서 좀 더 올르다가 무용교라는 다리에 못 미쳐서 봉황새바위를 바라보면 그 바위가 귀가 큰 토끼가 방금 뛰여내릴듯한 모양으로 보이지만 무용교를 건너면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구룡연쪽으로 달려 갈 자세를 나타내고 있는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봉황새바위는 비봉폭포와 무봉폭포사이에서 우뚝 솟은 기둥바위 꼭대기에 있는것만큼 비봉폭포 휴식장에서 바라보면 방금 아름다운 구룡계곡을 날아 갈듯 날개를 펴고 앉아있는 봉황새와 흡사하다. 이처럼 상서로운 새의 이름을 가진 봉황새 바위는 금강산의 수많은 기암중에서도 특이한 모양을 보여주는 바위로 알려져있다.
       련주담에서 좀 가파로운 길을 따라 160메터 오르면 휴식터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세존봉을 바라보면 그 중턱에 층층으로 된 바위벽을 타고 맑은 물이 쏟아져 내리는 긴 폭포가 있다. 이 폭포가 구룡폭포, 십이폭포, 옥영폭포와 함께 금강산 4대폭포중의 하나인 비봉폭포이다. 폭포수가 사방 우묵한곳으로 흘러내리면서 일어나는 돌개바람으로 하여 뽀얀 안개로 변하여 하늘 공중으로 뭉게뭉게 피여 오르는데 그 모양이 마치도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창공을 날아오르는것 같다고 하여 “비봉폭포”라 한다. 비록 비봉폭포는 물수량이 적으나 쏟아지는 모양이 신비하고 그 높이가 139메터이고 사거리또한 166메터나 되는 것으로 하여 예로부터 이름이 높아다 한다. 비봉폭포를 자세히 살펴보면 폭포수가 훝날리는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이 피여나는 것 같기도 한테 해빛에 반사될때면 색갈고운 무지개개 아롱져 그 아름다움이야날로 비길데가 없다. 세존봉에서 샘솟아 기화요초를 씻어내린다는 비봉폭포는 높은 벼랑을 따라 내리는데 폭포수가 문득 안으로 우무려든 절벽을 만나면 그만 의지할데를 잃고 뽀얀 물안개로 변하게 된다. 그러다가 또다시 허궁 뚝 떨어진 곳으로 쏫아져내려 직경20메터 길이 5-6메터되는 봉황담으로 들어간다. 참으로 비봉폭포는 자연이 낳은 신비한 환상과 같은 기이한 경치를 보여준 미의 정화였다.
       비봉폭포에서 100올라가면 천화대가 있고 무봉폭포쪽에서 200메터 굽이돌아 오르면 “무용교”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오르면 오른편서북쪽 방향의 옥녀봉골안에서 바위 짬 사이를 따라 가느다란 은실같이 곱게 흘러내리는 개울이 있는데 이것을 사람들은 “은사류”라 불렀다. 예로부터 이 개울은 흐르는 물이 아니라 늘어진 한줄기의 은실같다 하여 은사류라 부르게 되였다 한다. 은사류 건너편에는 “주렴폭포”라 무르는 은금폭포가 있었다. 은금폭포에서 조금올라가 구룡연쪽을 향하여 보면 마치 수십권의 책을 가득 포개놓은듯한 책바위가 보인다.
      주렴폭포를 지나면 온 골안을 뒤흔들듯, 물찧는 소리가 도도히 들려오고 조금 더 가면 구정봉에서 뻗어내린 구룡대의 깎아지를 버럭바위 벼랑이 뒤로 물러서면서 가리웠던 폭포가 흰 비단필을 드리운듯 나타나기 시작하고 얼마후에는 장쾌한 구룡폭포의 모습이 멀리서 보게 된다. 길을 재촉하여 오르고 보면 관폭정(구룡각)에 이르게 된다. 관폭정(觀瀑亭)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구룡폭포와 구룡연을 똑똑히 보면서 그 경광을 감상할수 있다. 관폭정에서 바로 보노라면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기개처럼 쉬없이 떨어지는 구룡폭포의 도도한 물줄기는 마치도 하늘에서 은하수가 그대로 내리 쏟치는듯 하다. 깍아 지른 폭포벽이 높이는 150메터, 폭포의 높이는 74메터, 사거리가 84메터,너비가 4메터인데다가 물량도 많아 동양에서 손꼽히는 크고 아름다운 폭포라 한다. 조선반도에서는 설악산의 대승폭포. 개성의 대흥산의 박연폭포와 함께 3대 명폭포다. 구룡폭포는 흙 한점없는 하나의 큰 통바위가 패워 말안장처럼 생긴 잘룩목을 넘쳐흐르며 흰 비단폭을 옹근필로 드리운듯 떨어지는 폭포는 그소리가 벼락을 치듯 요란한데다가 골안의 회오리 바람에 차디찬 싸락눈같은 물방울을 사정없이 휘몰아쳐 날리며 그 일부는 눈안개로 변하여 하늘로 올라가는듯 하였다.
       나는 아름다운 구룡폭포의 경관을 보면서 말과 글로 다 표달할수 없었다. 폭포수는 구룡폭포아래에있는 13메터 깊이의 절구확같게 뚫린 둥근 돌확에 들어가 서슬 푸른 물결로 소용돌이치다가 다시 솟아 나와 기세좋게 아래로 내리 닿는다는 구룡연이 있다. 이 돌확에는 옛날 유점사 늪에서 53불과 싸운 아홉마리의 룡이 살았다는 구룡연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였다한다. 지금이야 룡이 어데 있으련만 벼락치듯 요란한 폭포수의 소리에 어울려 소용돌이치는 구룡연의 시퍼런  물은 마치도 그속에 무엇이 있어서 조화를 부리는듯 하다.
      구룡연폭포 옆 너럭바위에는 9세기 말 신라의 유명인사 최치원(857-?)이 구룡폭포를 노래한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천발 흰 비단 드리웠나
                     만섬 진주알 뿌리였다
 
     나는 구룡연 폭포와 구룡연을 구경하고나서 하산하기 시작했다. 구룡연에서 한참 걸어 내려와 연달교 근처에서 뭠춰섰다. 연달교에 두갈래 길이 있었다. 고추 내려오는 길 왼쪽켠에 상팔담으로 올라갈수 있는길이 있었다. 가이드는 상팔담으로 올라가는 길이 가파로워 유람객들이 자원으로 상팔담으로 올라가실분들은 올라가고 못 올라가실분들은 그냥하산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상팔담으로 오르기로 하였다.  언제 다시 금상산 구경을 올지 모르는판에 꼭 상팔담으로 오르기로 마음을 굳치였다.
    산아래에서 상팔담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로운 길인데 어떤곳은 사다리 길이였다. 산아래에서 상팔담까지 거리는 700메터였다. 나는 처음에 사다리 길을 올를때 내 신체가좋다고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는데 300메터를 오르고 보니 숨이차 헐덕거렸다. 한시간 만에 해발 850메터 데는 구룡대에 올랐다. 구룡대에 오르고 보니 땀참봉이 되였다. 구룡대에서 구룡폭포 의 물줄기로 되는 상팔담을 내려다 볼수있었다. 상팔담이란 비로봉에서 샘솟는 물이 구룡대를 감도는 골안에 련달아 여덮개의 푸른 담을 이루다가 구룡폭포의 폭포수로 되고 있었다. 나는 상팔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나니 저도 몰래 땀이 잦아들었다.
     김민진 안전원은 이런 말을 했다. 금강산에는 팔선녀가 있고 중국에는 칠선녀가 있으며 인도에는 륙선녀가 있다고 했다. 이전에는 상팔대에서 상팔담으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는데 지금은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유람객들은 상팔대에서 내려다 볼뿐이였다. 나는    멈껏 상팔담을 구경하고 나서 천천히 내려왔다. 사다리길을 올라가기보다 내려오는것이 더 힘든감이 들었다.
     우리는 구룡연정차장에 집합하여 점심을 자시였다. 구룡연정차장에서 외금강을 한바귀돌아 보는데 5섯시간이 걸리였다. 늦은 점심을 자시고 잠간휴식하였다. 우리는 내려오는 길에서 방향을 돌려 금강산에서 유명한 절인 신계사에 들렸다. 신계사에는 스님두분이 계시였다.
     신계사는 519년 신라 법흥왕(514-540년)때 보운조사가 처음 건설하였다. 임진왜란때 파괴된 건물을 1597년애 새로 세웠다. 신계사는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와 함께 금강산의 4대 절이였다.
     한금희 안내원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였다.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는 한때 내금강 표운동의 백화암에 와 있었고 외금강 유점사에는 사명당이 살고 있었다 한다. 이들은 모두 이름난 중으로서 불도에는 물론 도술도 통달하고 있었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은 금강산에 있으면서도 서로 만나본적이 없고 다만 풍문을 통하여 각각 지략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따름이였다. 더구나 사면당은 기묘하고 웅장한며 아름다운 금강산의 정기를 타고났기때문에 지략이나 도술에 있어서는 자기가 제일이라고 자처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사명당의 귀에는 묘향산에서 도술이 아주능한 서산대사라는 중이 내금강 백화암에 와 있다는 소문이 들어왔다. 그는 한번 만나 도술로 재주겨누기를 하여 본때를 보여주고 재자로 삼아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서산대사를 찾아 오무래재령을 넘었다. 백화암 뜰에 다달은 사명당은 서산대사를 만나자마자 서로 인사를 나누지 않고 날아가는 참새 한 마리를 자기 몸곁으로 오게 하여 손에 감싸 쥐고서 서산대사에게 “이 참새가 살아겠소 죽었겠소?”하고 물었다. 그때 서산대사는 사명당을 맞아들이려 문턱에 한발을 내 디디던 걸음을 멈추고 서서 “대사남이 초면에 롱단을 곧잘 하는군, 그래 내가 지금 나가겠소 들어가겠소?”하고 되 물었다.
     바로 이것이 사명당과 서산대사 사이에 처음 주고받은 첫 인사였다고 한다. 사명당을 방안에 맞아들인 서산대사는 동자를 시켜 물그릇에 물고기를 몇 마라리를 넣어 사명당의 앞에 내 놓으며 “우리들은 다같이 불교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물고기는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로 뱉아놓아 이전대로 살려주면 이므런 탈이 없을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 물고기를 먹기 시작하였다. 조금있다가 서산대사가 물고기를 그릇에다 다시 뱉아놓으니 종전처럼 물고기가 다시 헤염을 치고있었다 한다. 사명당도 서산대사에게 지지 않으려고 애를 써서 물고기를 먹었다가 토하였는데 그 물고기는 제모양대로 되기는 하였으나 살아 움직이지는 못하였다 한다.
      이처럼 첫 도술 겨루기에서 서산대사한테 놀리운 사명당은 얼굴을 붉히면서 닭알쌓는 내기를 해보다고 제기하였다. 동자가 닭알을 넣은 바구니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오자 사명당은 그 닭알을 밑으로부터 하나하나 쌓아았다. 이것을 바라보던 서산대사는 닭알을 공중에서부터 쌓아내려갔다. 사명당은 속으로 “서산대사의 도술은 사람이 하느것이 아니로구나”하고 탐복하였다 한다.
     이러다보니 어느덧 점심때가 되였다. 서산대사는  “시정하시겠는데 우리 같이 점심이나 나눕시다.” 하며 동자더러 점심을 차려오게 하더니 “맛이없는 국수인데 많이 드시오.”라고 권하는 것이였다. 동자가 국수라고 밥상에 갖추어온것은 사명당이 보니 그것은 국수가 아니라 바늘이였다. 그것도 놋그릇에 무득히 담겨져 있었다. 점심상을 마주한 사명당이 머뭇거리자 서산대사는 너지시 “시장하시겠는데 어서 드시오. 여긴 외진곳이라 이런것밖에 아무것도 없구려.”하면서 그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사명당은 도저히 저가락을 들 생각이 나지않았다. 이렇게되자 사명당은 더는 서산대사에게 도술내기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손히 서산대사앞에 무릅을 끓고 엎드리면서 “대사님, 외람된 저를 용서해주옵소서. 저는 이때까지 도술에서는 저만이 이 세상에서 음뜸인줄 알았사오왔는데 이제부터는 대사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평생을 따르려 하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후부터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제자가 되였다한다. 임진왜란 시기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다 왜적과의 싸움에서 용맹하였으며 왜국에가 항복서를 받아 냈다고 한다.”
     우리는 신계사를 돌아본후 고추 해금강으로 갔다. 해금강은 외금강호텔에서 약 30분 달리자 도착하였다. 해금강은 강원도 통천군과 고성군의 동부 조선동해다가에 자리잡고 있었다. 해금강이란 뜻은 금강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바다에 갔다놓은것이라 한다.
     금강산의 웅장하고 기이한 지맥이 물속으로 뻗어내리면서 천태만상의 봉우리들과 기암괴석들을 그대로 바다에 옮겨 놓은 것 같은 해금강의 이끼 낀 바위와 섬, 그리고 푸른 소나무를 머리에 인 낭떨어지들로 이루어져있어 물결이 바위와 절벽에 부디쳐 흰 갈기를 날리는 광경은 참으로 장쾌하였다.
     외금강을 보다가 해금강에 와보니 별로 볼거리가 없는감이 들었다. 하지만 해금강의 바다와 바위를 보니 가슴이 탁 트이는감이들었다. 유람을 다니다보면 산을 보는 기의한 멋과 지평선저멀리까지 펼처진 바다와 바다가를 보는 멋이 다르다. 외금강에서는 외금강의 아름다운 모습에 와! 소리를 련발했다면 해금강에 와서는 바다를 향하여 목이터지도록 외치였다.
    우리는 해금강 해변가에서 사진도 찍고 조개주이도 하였다. 그리고는 삼일포로 갔다. 해금강구역에는 삼일포라는 유명한 호수가 있었다.
    삼일포(三日浦)는 예로부터 조선의 관동팔경중의 하나로서 이름난 호수였다. 옛날 어떤 왕이 이호수로 하루동안 놀기로 하고 왔다가 호수의 경치가 하도좋아 3일동안 가지않고 놀고 갔다고 하여 삼일포란 이름을 가지였다고 한다.
     삼일포는 호수가 맑고 고요하여 옛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는 미인의 영원한 미소와 갖다고 칭찬하였다 한다. 내가 보건대도 삼일포는 금강산의 장엄한 모습과 어울려 온화하고 아늑한 맛을 주는 호수가 잘 어울린 풍경이 마치 한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하였다.
     삼일포는 워나 바다였는데 지질 변동으로 하여 바다와 갈라지면서 호수로 변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함수호였는데 지금은 담수호로 되였다한다. 지금 삼일포 호수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있는데 길이가 1메터가 넘고 무게가 25킬로이상되는 잉어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삼일포를 돌아본후 금강산 해수욕장으로 갔다. 넓은바다를 앞에둔 금강산 해수욕장은 날씨가 좋지않는데도 해수욕을 하는사람이 많았다. 나는 금강산유람과 해수욕장을 찾은 유람객이 대부분 중국인이거나 외국인일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오늘 보니 금강산유람을 온 유람객 다수가 조선의 유람객이였다. 조선에서는 집단적이거나 가족들이 금강산 유람을 오고 있었다. 해수욕장에서는 모래판 배구대회가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도 한번 바다물에 뛰여들고 싶었다. 그런데 바다물을 보니 추운감이 들어 해수욕을 못하였다.
    하루동안 외금강과 해금강, 해수욕장을 돌고 보니 피곤하였다. 저녁을 자시고는 인츰 잠들었다.
    이튼날 우리는 만물상을 보려고 떠났다. 만물상은 구룡연 골과 다른 골에 있었다. 처음 만물상으로 간다고 하자 나는 이상스런생각이 들었다. 자료에는 금강산은 외금강, 내금강, 해금강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나는 내금강으로 가는 줄로 앓았다. 그런데 내금강으로 가지않고  만물상으로 간다고 하자 이상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이드한테 만물상은 내금강에 속하는가? 물었다. 가이드가 하는 말이 내금강을 유람을 할수있는 길이 제대로 닦지 못하여 내금강을 가지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물상은 내금강 구역이 아니고 외금강 구역에 속하여 있다고 했다. 외금강은 산발이 억세여 남성다운 멋이 있지만 내금강은 화려하고 부드러운 감이 드는 녀성다운 감이 든다고 했다. 내금강에는 옛적부터 왕족과 사대부들이 놀던 놀이터와  별장들이 많다고 한다.
     차를 타고 온저동의 서쪽길로 15km 가면 만상정에 이르게 된다 만상정에서 산길을 따라 올리걸으면 삼선암, 귀면암, 칠층암, 절부암, 안심대, 망장천, 하늘문 등 시의한 산봉우리들을을 보게 되고 만물상 전망대에 올라 전반 만물상의 특이하 산악미를 감상할수있었다.
     전날에 구룡연 지역을 힘들게 걷고 나니 오늘은 세상일이 귀찬아 보였다. 하여 만물상을 열심히 관찰해 보지않고 대충보고 말았다. 눈치를 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나와 같은 태도였다.
      귀로에 오르면서 나는 외금강, 해금강, 만물상을 보았던 신기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그려 보았다.
해금강 바위는 둥근넓적한 바위들로 형성되였고 구룡연 지역의 바위들은 희색을 띤 넓적바위들이였으며 만물상 바위들은 다 쪼각 바위들로 구성되였다. 다같은 화강암이지만 바위모양이 다른것은 파도와 물, 비 바람에 부디치고 씻기는 정도에 따라 부동한 형태의 바위들로 보였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만물상을 본후 차를 돌려 직방 평양으로 향하였다. 평양에서 이곳으로 올때에는 밤이여서 동서남북을 분간할수없고 올리막길과 내리막길을 알수없었는데 오늘은 낮이여서 환히 볼수있어 기분이 좋았다. 금강산에서 원산으로 오는길은 해변가 길로서 평탄하였다.
     원산으로 부터 평양으로 오는 사이에 황해도의 곡창지대가 있었다. 황금의 벼들이 미풍에 설레이고 있었다.
우리는 평양에 도착여 평양에서 제일 호화로운 호텔 고려호텔에 주숙하였다.
     금강산 려행을 마치고 나니 예기했던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감이들면서 흐뭇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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